서양 역사 로맨스의 배경 - 1.결혼식

by 삼월토끼 posted Oct 03, 2009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 - Up Down Comment Print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 - Up Down Comment Print

 

 

19세기 영국에서는 청혼도 엄연한 결혼식의 한 절차 였다. 낭만주의가 만연한 시대 분위기상 남녀가 사랑을 속삭이는 것은 자유스러웠지만, 일단 연애에서 청혼 단계로 들어가면 상류 사회의 까다로운 시선에서 벗어 날 수 없었다.


청혼

신사는 레이디에게 청혼을 하기 이전 레이디의 아버지 혹은 손위 남자 형제에게 먼저 청혼 승낙을 받아야 청혼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는데 레이디의 아버지는 사위 후보의 사회적 지위나 경제적으로 아무런 문제가 없으면 그에게 축복을 빌어주었다.

일단 승낙을 받은 신사는 레이디 앞에 무릎을 꿇고 레이디의 손을 잡은 후 청혼을 하는데 청혼이 이뤄진 장소는 으슥한 정원이나 단 둘만이 있을 수 있는 조용한 서재 같은 장소가 아니라 대개 응접실로 레이디의 가족이 동석하는 경우도 있었다. 청혼이 받아들여지면 이제 이 사랑스런 연인들은 약혼은 사회적으로 공식화 되고 약혼을 증명하는 약혼 반지가 교환 됐다.

 


반지

가장 인기 있는 약혼 반지는 러브 노트(Love Kont : 일명 사랑 매듭) 스타일의 금반지였다. 끝도 시작도 없는 매듭의 형태는 영원과 사랑과 연인들을 늘 함께 묶어 줄 거라는 믿음을 줬으며 평범한 금반지 스타일 역시 사랑의 끝나지 않는 원을 상징한다고 여겨졌다.

반지를 장식하고 있는 다양한 보석에도 의미가 담겨져 있었는데 오팔, 에메랄드, 진주는 불운과 눈물을 상징한다 하여 기피됐고 사파이어와 루비는 열정적인 애정과 불사의 삶을 내포하고 인기 품목이었다. 뭐니뭐니해도 지금이나 예나 제1순위의 인기를 자랑하는 보석은 다이아몬드였다. 투명한 외관은 순수를 나타냈으며 세상 어느 물질보다 단단한 강도는 깨지지 않는 영원한 사랑을 의미했다.

빅토리아 시대에 가장 인기가 높았던 반지의 디자인은 상대방의 머릿 글자에 맞춰 보석을 박아 넣는 집시 링(Gypsy ring) 스타일로 빅토리안 여왕의 맏아들인 알버트 황태자가 약혼녀인 알렉산더 공주에게 선물한 집시링에는 황태자 자신의 애칭인 버티(Berite)에 해당하는 보석 5가지와 공주를 상징하는 다이아몬드를 박아 넣었다.


집시 링에는 상대방의 머릿 글자 외에도 Love,Amour,Amite 등의 사랑을 뜻하는 단어를 넣은 것이 유행이었으며 약혼 반지나 결혼 반지는 심장에 연결돼 있다고 믿었던 왼손 네번째 손가락에 끼었다.

 

유래

바쁜 현대인들이 가장 선호하는 결혼식날은 아마도 토요일일 것이다. 하지만 19세기에 토요일은 결혼하기에 최악의 날이었다. 결혼식은 어느 요일에 하냐에 문제는 어느 달에 결혼을 할 것이냐에 문제만큼 중요했는데 당시에는 월요일의 결혼은 건강을 화요일의 결혼은 부를,수요일의 결혼은 모든 것이 최상, 목요일의 결혼은 손해, 금요일의 결혼은 고생, 토요일의 결혼은 최악의 운 이라는 속설이 있었다.

 
6월은 결혼의 여신이 유노(그리스 여신 헤라에 해당)를 따서 붙여진 탓에 가장 결혼하기 좋은 달로 여겨졌는데 이 달의 결혼하는 커플에게는 유노 여신이 행복과 부을 가져다 준다고 믿어졌다. 현실적으로도 온후한 날씨가 계속되는 6월은 영국의 귀족들이 휴양지인 바쓰로 온천욕을 떠나는 시기이며 사순절(기독교에서, 예수가 40일 동안 광야에서 금식하고 시험받던 수난을 기억하기 위하여 단식·속죄를 하도록 규정한 기간. 부활 주일 전 40일 동안)이 끝나는 달이기도 했다. 또한 6월에 결혼을 하면 봄에 첫 번째 아이를 출산할 수 있기에 가장 중요한 사교 시즌까지 몸을 회복할 수 있다는 이점도 자리잡고 있었다.

 
가을에 결혼하는 것도 시기적으로 나쁘지 않았는데 풍요를 상징하는 계절인 만큼 결혼 생활도 넉넉하리란 믿음이 자리 잡고 있었다. 하지만, 우리 나라에서 가장 인기 있는 달인 5월의 신부는 19세기 영국인들에게는 최악의 달이었다. 그 원인을 찾아보면 지극히 종교적인 발상 차이에서 오는 터부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과거 영국인들이 기독교를 믿지 않던 시절에 여름의 시작인 5월은 이교도의 축제인 각종 주신제가 몰려 있었기 때문이다.

혼수

새 신부들에게 약혼과 반지 교환 같은 일련의 결혼식 과정에서 또 하나의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을 꼽으라면 단연코 혼수감이었다. 그리고 대부분의 혼수감 목록을 차지하는 것은 - 지금과는 매우 다르게 - 옷이었다. 19세기의 패션 잡지나 신문에는 부유한 신부들이 마련해 가는 놀랄 만한 혼수품 목록을 볼 수 있는데 이런 선택 받은 신부 중 한 사람이었던 미국인 여성 플로렌스 애들러 슬로안의 경우 각종 무도회와 공식 행사용 드레스로 - 참석할 수 없는 경우까지 고려해 드레스를 맞췄다. - 4만달러(약 3,600만원) 를 지불한 것으로 알려졌다. 19세기에 이 돈의 가치는 일반적인 직장인의 70년치 월급에 해당하는 거액이었다.

하지만 이는 전세계 금융 업계를 지배하고 있는 로스차일드 가문의 베티나 로스차일드의 혼수 목록에 비하면 빙산의 일각으로 베니타 로스차일드는 수백가지에 이르는 혼수품을 위해 당시 돈으로 이십만 프랑(약 1억 6천만원)을 아낌없이 쏟아 부었다. 그 중 하나인 여성용 파라솔은 장미빛 실크 커버에 아마빛 거즈와 레이스로 장식을 하고 머릿 부문에는 에메랄드를 박아 넣고 손잡이는 옥으로 세공했으며 그외에도 다앙한 종류의 보석으로 장식했다고 한다.

이런 사치가 극에 달한 상류 계층에 비해 하류 계층의 가난한 처녀들은 자신들이 직접 나서서 혼수감을 마련해야만 했는데 데이트도 하기 전부터 혼수 상자(미국에서는 Hope Chest 영국에서는 bottom drawer로 표기)를 마련해 한땀한땀 정성드려 속옷과 옷을 지었다.

 

웨딩 드레스

결혼식과 관련된 미신이나 금기 사항은 악운을 막고 행운을 불러 오기 위한 것으로 그 중 로마 시대에서 유래된 관습중 하는 결혼식에 참석하는 여성들은 비슷한 옷차림을 하는 것으로 이는 악마를 혼동시키기 위한 목적이었다. 전통적으로 신부의 웨딩 드레스의 색깔은 강렬한 빨강과 죽음의 색인 검정을 포함해서 팔렛트에 있는 색조라면 무엇이든지 가능했다.

지금같은 하얀색 웨딩 드레스가 결혼식 신부의 옷차림으로 자리 잡은 것은 1841년 빅토리아 여왕이 알버트공과의 결혼에서 흰색 웨딩 드레스를 선보인 이후 부터이다. 전통적으로 왕가의 결혼식 드레스의 색은 은색이었지만, 여황은 자신의 결혼식 드레스로 레이스로만 장식된 간소한 형태의 흰 웨딩 드레스를 선택했다. 이 때부터 흰색 웨딩 드레스는 순결과 처녀성을 상징하며 대표적인 웨딩 드레스의 색깔로 자리 잡았다.

웨딩 드레스의 형태는 시대에 유행하는 드레스의 디자인을 따라 달라 졌는데 섭정 시대에는 가슴선이 높은 엠파이어 라인에 최소한의 장식과 레이스만 사용한 매우 간소한 형태의 드레스였으나 빅토리안 시대에 이르면 풀 스커프에 후프와 페티코트를 입어 풍성해진 하의에 몸에 꼭 맞는 보디스(드레스의 윗 부분)로 이뤄진 웨딩 드레스가 등장하기 시작했다.

빅토리안 시대의 레이디들은 결혼식용과 왕궁 알현용으로 두개의 보디스를 한꺼번에 마련하기도 했다. 이 밖에도 예식용 정장에는 구색을 맞춘 비단 장갑과 신부의 처녀적 머릿 글자가 공들여 수놓아진 손수건, 그리고 비단 스타킹이 웨딩 드레스 일습에 포함 됐다. 신부는 페티코트 안에 작은 빵 부스러기, 지폐, 작은 천 조각, 나무 조각등을 넣은 작은 쌈지를 달았는데 이것은 결혼 생활동안에 음식, 돈, 의복, 주거 등이 풍족하길 기원하는 풍습이었다.

 
18세기 후반에 이르면서부터 신부들은 얼굴을 전부 가리는 하얀색 베일을 쓰기 시작했는데 베일은 신부가 교회를 떠나기 전까지 절대로 걷을 수 없었다. 예식중에 장갑을 벗을 수 없으므로 반지를 손쉽게 끼게 하기 위해서 장갑 네번째 손가락에는 긴 트임을 넣는 아이디어가 등장하기도 했다.

혼례 역사를 통털어서 신부들은 항상 꽃으로 만들어진 화환이나 싱싱한 잎으로 된 화관 형태의 머리 장식을 착용했다. 로마 시대에부터 시작된 이 전통은 악신이나 역병으로부터 신부를 감추기 위한 한 방편에서 유래됐는데 19세기 유럽에서는 베일이 신부의 정숙과 순결을 상징하는 의미로 자리 잡았다.

순결과 순수를 상징하는 또 하나의 상징물은 오렌지 꽃으로 신부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머리와 옷을 오렌지 꽃으로 화려하게 장식했으며 베일 위에는 오렌지 꽃으로 만든 코로넷(작은 관 모양의 머리 장식품)을 얹었고 부케를 만들기도 했다. 결혼식을 빛낸 꽃으로 장미도 빼놓을 수 없는데 장미의 색에 따라 다양한 의미를 부여하기 했다. 흰장미는 순수와 영원한 사랑을 의미하므로 단연코 인기가 높았다. 신부가 결혼식에서 선택하는 꽃은 그 종류가 무엇이 되었든 신부의 꽃으로 남아서 해마나 아내의 기념일에는 남편이 아내에게 결혼식 꽃으로 장식한 선물을 주는 것이 풍습이었다.

부케

신부가 부케를 들고 행진하는 풍습 역시 고대에서부터 시작된 것으로 신부가 강한 향을 내뿜는 허브나 향신료를 들고 있으면 악마의 접근을 차단한다는 생각에서 비롯됐다. - 마늘로 드라큘라를 쫓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닥 낭만적인 유래는 아니다. - 로마 시대에는 좀 더 의미가 확대돼 신랑 신부는 새로운 시작에 대한 희망과 순결을 상징하는 화관과 화환을 착용했다. 부케를 들고 행진을 하는 것에는 한창 때의 여성임을 나타내는 것이기도 했다.

19세기 초기에 신부들은 포시(posy)라 불리운 작은 부케와 때때로 집안 대대로 내려 오는 기도서를 들고 행진을 했는데 19세기 후반으로 갈수록 부케의 크기가 화려해지고 커지기 시작했다. 채터레인(여자 성주)라고 이름 붙여진 대형 부케는 중심에 흰 장미로 다발을 만든 뒤 장미를 한송이씩 사용해 나팔꽃으로 화려하게 펼쳐 놓는 형태였다.

또 부케에는 여러개의 리본과 러브 노트로 장식하기도 했는데 이 장식 매듭의 갯수에도 여러 가지 의미가 부여돼 있어 세 개의 러브 노트는 행운을 리본은 영원한 사랑이라는 의미가 담겨 있었다. 신부는 결혼식이 끝난 후에 신부 들러리들에게 부케의 꽃을 나눠주거나 또는 어깨 너머로 던졌는데 이 부케를 받는 사람이 다음 번에 결혼한다고 믿어졌다. 신부의 가터(garter)를 던지는 것은 부케의 남자 버전으로 이것을 잡는 독신 남성에게 차기의 결혼 순번이 돌아 온다고 여겼다. 원래 가터를 던지는 풍습은 중세 시대에 손님들이 신랑 앞에서 신부의 옷을 벗기는 것이 약소화 된 것이다.

 

결혼식

19세기 말까지 결혼식은 대게 이른 아침에 교회에서 거행됐다. 하지만 우리에게 친숙한 결혼식 축가는 1858년 빅토리아 여왕의 장녀 빅토리아 공주가 결혼할 때까지 울려 퍼지지 못했다. 빅토리아 공주는 프러시아의 프레드릭 빌리엄 왕자와 결혼하면서 바그너의 혼레의 합창(오페라 로엘그린 3막에 곡으로 흔히 축혼 행진곡으로 알려져 있음)과 멘델스존의 결혼 행진곡(한 여름밤의 꿈 서곡)을 자신의 결혼식 주제가로 선택 했는데 이후부터 신부가 제단으로 걸어갈 동안에는 엄숙한 혼례의 합창이 울려 퍼지고 부부가 탄생해 교회를 떠날 때는 멘델스존의 중 결혼 행진곡이 연주 되는 것이 하나의 관례로 자리 잡게 된 것이다.

결혼식에서는 꽃과 함께 다산을 상징하는 것은 바로 아이들이었다. 꽃바구니를 든 소녀가 제단으로 행진하는 신부보다 조금 앞서 걸으며 들고 있는 꽃바구니에서 조금식 꽃잎을 뿌렸는데 붉은 카펫에 떨어진 꽃길은 행복의 지름길이라고 여겨졌다. 신부의 긴 웨딩 드레스 자락을 들어 주거나 사랑의 징표인 반지나 또는 다산의 상징인 밀 다발을 운반하는 역할은 시동 차림의 어린 소년에게 맡겨졌다.

 
신부는 아버지의 왼팔을 잡고 통로를 걸어 들어가 제단 왼편에 서고 신랑은 신부의 오른편에 섰는데 중세 시대부터 남자는 방어를 목적으로 오른쪽에 검을 찬 것에서 비롯됐다. 이제 제단 앞에선 신랑 신부는 힘과 의지를 뜻하는 오른손을 서로 맞잡고 - 이제 남은 삶을 하나로 살겠다는 표시 - 엄숙한 사랑의 맹세를 한 뒤 계약의 봉인을 의미하는 키스를 나눴다. 키스에는 서로의 영혼을 교환한다는 의미도 있어 이제 평생 동안 배우자의 몸 안에 서로의 정신이 깃들어 있게 됌을 의미했다.

결혼식 후에 신랑 신부는 앞만 보고 걷는 것이 풍습이었는데 오른쪽이나 왼쪽을 봐서도 안되고 아는 사람에게 눈짓을 하는 것도 금기로 간주됐다. 신랑 신부가 교회를 떠나면 다음으로는 신부의 부모님, 신랑의 부모님이 차례로 교회를 나섰고 마지막으로 신랑 들러리는 사제에게 주례비 - 신혼 부부에게 행운을 불러 오기 위해서 홀수로 돈을 지불하는 미신이 있었다. - 지급한 뒤 교회를 나섰다.

 
교회를 나선 신랑 신부를 하얀색 네 마리 말이 끄는 마차를 타고 교회를 떠났는데 이 때 하객들은 다산을 상징하는 쌀, 낟알, 새모이, 꽃잎등을 신혼 부부에게 던졌다. 오늘날 색종이등을 던지는 것을 이탈리아어로 콘페니(confetti)라 부르는데 이것은 원래 달콤하게 살라는 뜻으로 당의를 입힌 아몬드등을 던지는 행위가 바뀐 것이다.

 
1890년까지 영국에서 결혼식 피로연은 신부의 집안에 마련됐는데 그 후 정원에서 결혼하는 것일 일반화 되기 시작하자 피로연도 야외에서 열리기 시작했다. 결혼식은 대개 이른 아침에 열렸기 때문에 피로연은 웨딩 브렉퍼스트(wedding breakfast) 라고 불렀는데 뷔페 형식으로 대접됐다. 메뉴는 육류나 가금류의 구이, 바닷 가재, 샐러드, 샌드위치와 사탕, 프티 프루(petit fours : 당의를 입힌 작은 케익), 케익 같은 디저트류가 주를 이뤘다.

결혼 피로연은 대개 2시간 정도 진행 됐으며 - 이른 아침 시간임으로 당연히 춤이나 여흥 거리를 마련 되지 않았다. - 신부가 웨딩 케익을 자르는 것으로 마무리 됐는데 신부가 케익을 자르는 행위에는 최초의 가사일 이라는 상징이 담겨 있었다.

 
신랑 신부가 자른 첫 번째 자른 케익 조각은 먹지 않고 기념으로 보관해 향후 25년주년 결혼 기념일에 개봉하는 것이 풍습이었다. - 영국의 결혼 케익은 브랜디와 설탕은 넣어 조린 형식으로 당장법(糖藏法) 덕에 장기간 보관 가능하다. 최근에는 심프슨 부인과 에드워드 공의 결혼식 케익이 경매에 등장하기도 했다.

 
웨딩 케익은 신혼 부부가 자르는 케익 말고도 별도의 케익이 두 개 더 준비돼 부페 테이블 양 끝에 놓여 졌는데 각각 신부 케익과 신랑 케익이라는 별칭이 붙여졌다. 이 신부 케익과 신랑 케익은 신부 들러리와 신랑 들러리의 수 만큼 정확하게 나뉘어 졌는데 첫 번째 잘린 케익 조각은 신부 들러리가 선택할 수 있는 권한을 얻었다. 특히 이들 케익에는 반지나 일 페니(영국의 화페 단위), 단추, 골무 등을 넣어 구웠는데 링은 올해 안에 결혼, 페니는 부, 골무는 노처녀나 노총각, 단추는 연인과의 결별을 의미했다.
 

허니문

결혼 피로연이 끝나면 신혼 부부는 신혼 여행을 떠났는데 예외적으로 결혼식 다음날 신혼 여행을 떠나는 부부의 경우 Charivari 라 불린 친구들의 짓궂은 장난질에 시달려야 했다. 이 풍습은 중세 부터 유래된 것으로 친구들은 종,호루라기,냄비,팬, 주전자등을 가지고 신혼부부의 집으로 몰려가 다과를 대접 받을때까지 창문 밑에서 온갖 굉음을 냈다.

허니문의 기원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학설이 있는데 과거의 결혼은 구혼이 아니라 납치 행위로 남자가 신부를 가족들로 납치해 찾을 수 없도록 은신처에 숨겨 놓았는데 이 은둔 기간이 달이 꽉차는 기간(30일)이었으며 이 시기에 연인들은 벌꿀로 만들어진 미드(Mead : 벌꿀술)를 마셨기 때문에 여기서 허니문이 유래했다는 것이 학설 중 하나이다.

또 다른 학설은 약 4000 년전 바빌로니아에서 허니문이 유래됐다는 것이다. 전통적으로 결혼식 이후 한달 동안 신부의 아버지가 사위에서 벌꿀술을 대접했는데 태음력을 사용하는 것과 맞물려 이 기간을 honey - month 라 불렀고 여기서 허니문이라는 단어가 파행됐다는 주장이다.

현재는 신혼 여행이 신혼 부부가 단 둘이 은밀한 시간을 보낼 수 있는 기간으로 인식이 굳어져 있지만 과거에는 친한 친구나 친척과 동행하는 것이 일반적이었고 심할 경우 말동무를 동행하는 경우도 있었다.

신혼 여행에서 돌아온 신혼 부부는 신랑이 신부를 들고 문지방을 넘는 것이 풍습이었는데 이는 신부가 문지방을 넘다가 발뿌리가 걸리거나 왼발이 먼저 문지방을 넘을 경우 불운을 가져 온다고 믿었기에 이를 방지하기 위한 대책이었다.

 

미신

발렌타인 데이에 미혼 여성이 머리 위로 날아가는 울새를 보게 되면 선원과 결혼하게 되며 오색 방울색을 보면 백만장자와 결혼, 제비를 보면 매우 가난한 남자와 결혼하게 되지만 평생 행복하게 살게 될 것이다.

무당 벌레를 잡았다가 다시 날려 보낼 경우 무당 벌레가 날아간 방향에서 미래의 남편감이 올 것이다.

남자가 청혼을 하러 가는 중 수녀와 수도사와 마주치는 것은 결혼 생활 중에서 불임을 예언하는 것이다. 비둘기,늑대,어미 염소를 보면 좋은 징조다.

퀼트는 시작해서 끝내지 못하면 영원히 결혼하지 못 한다.

신부는 결혼 전에 절대로 남편 성을 미리 사용하거나 연습 해서는 안된다. 또한 여자의 결혼 전 머릿 글자와 남자의 머릿 글자가 동일한 것도 불운을 가져 온다.

결혼식에서 신부의 아버지가 신랑에게 딸을 인도한다는 것은 딸에 대한 모든 권한과 책임을 준다는 의미도 총각 파티는 원래 도박을 통해서 결혼 생활 안정 자금을 마련하는 창구 역할 을 담당했다.

신부 파티는 신부의 아버지가 딸의 결혼을 승낙하지 않을 경우 지참금 마련을 위해서 신부의 친구들이 생활 도구를 선물해 주던 관습이었다.

결혼식 전에 신랑이 신부를 보는 것은 불운을 가져 온다.

신부는 절대로 결혼식 전에 웨딩 드레스 일습을 갖춰 입으면 안되며 자신의 웨딩 드레스를 직접 만드는 것도 불운을 가져 온다.

신부 들러리의 기원은 바람잡이로 신부와 비슷한 옷차림을 한 신부들러리를 내세워 악마를 혼동시킬 목적으로 탄생했다.

결혼식장을 장식하는 꽃은 어떤 꽃이든 상관 없었지만 모란처럼 꽃말이 부끄러움을 상징하거나 붉은 색과 흰색이 혼합돼 있는 꽃은 피와 붕대를 상징하므로 제외 됐다.

신부가 결혼식장으로 떠나기전 마지막으로 한 번 겨울을 보는 것은 행운을 불러 오지만 교회에 가는 도중 겨울을 보면 반대의 결과를 가져 온다.

결혼식과 피로연을 위해서 꽃이 핀 오솔길을 걸어가게 되면 행운을 불러온다.

무지개, 검은 고양이, 거미, 두꺼비, 양, 햇빛을 보게 되면 행운의 징조이며 그 중에서 굴뚝 청소부가 신부의 빰에 키스를 하는 것을 최고로 쳤다. 행운을 가져 오기 위해서 결혼식날 굴뚝 청소부를 고용하는 집도 있었다.

바람이 불거나 구름낀 하늘은 결혼 생활 내내 폭풍우가 칠 징조이며 돼지, 산토끼, 열려 있는 무덤, 수도사나 수녀, 때에 상관 없이 우는 수닭의 울음 소리등은 불운의 징조다.

신랑 신부가 교회에 도착했을 때 종을 치는 것은 하객들은 모으기 위한 목적 뿐만 아니라 시끄러운 소리를 내서 악마를 쫓기 위한 목적도 있었다.

고대 농경 사회에서는 신부의 눈물은 비를 불러 온다하여 행운으로 간주했으며 결혼식장에   서 운 신 부는 결혼 생활 동안 다시는 울 일 - 불행한 일 - 이 일어나지 않는다고 믿었다.

신랑 들러리의 임무는 신랑을 악한 기운과 외부의 적으로부터 보호하는 것으로 신랑이 안전하게 교회에 도착하는 것을 최우선 과제로 삼았다.

신랑 신부를 만지는 것은 행운을 가져 온다고 믿었다.

과거에는 신부의 아버지가 신랑에게 딸에 대한 모든 권리는 넘긴다는 의미로 신부의 구두 한쌍을 주었으며 신부는 부케 대신 구두를 던지기도 했다.

[Copyright ⓒ 로맨스웹진 로맨시안(www.romancian.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Designed by sketchbooks.co.kr / sketchbook5 board skin

나눔글꼴 설치 안내


이 PC에는 나눔글꼴이 설치되어 있지 않습니다.

이 사이트를 나눔글꼴로 보기 위해서는
나눔글꼴을 설치해야 합니다.

설치 취소

Sketchbook5, 스케치북5

Sketchbook5, 스케치북5

Sketchbook5, 스케치북5

Sketchbook5, 스케치북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