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기의 로맨스 1. 심프슨 부인

by 삼월토끼 posted Oct 03,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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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애

한 여인을 위해 왕위를 버린 왕과 두 번의 이혼 경험이 있는 유부녀의 사랑은 아직까지도 사람들에게 세기의 로맨스로 각인되어 있다. 이 화려한 로맨스 주인공은 각각 윈저 공작 에드워드경과 심프슨 부인으로 더 알려져 있는 윌리스 워필드이다.

국민에게 사랑받던 왕을 왕좌까지 버리게 했다하여 한때 모든 영국 국민들의 미움을 받았던 심프슨 부인은 본명이 베시 월리스 워필드(Bessie Wallis Warfield)로 펜실베니아의 블루 릿지 서미트(Blue Ridge Summit, Pennsylvania) 에서 1896년 6월 19일에 태어났다.

그녀는 미국의 명망있는 가문 출신이었지만, 그녀가 태어난지 채 몇날도 되지 않아 그녀의 아버지 티클 월리스 워필드(Teackle Wallis Warfield)가 폐결핵으로 사망하자, 어머니 앨리스 몬태규 워필드(Alice Montague Warfield)와 어린 베시는 거의 무일푼 상태로 보수적인 할머니와 함께 살 수 밖에 없었다.

당시 더 시보드 에어 라인 레인웨이(The Seaboard Air Line Railway)의 대표였던 그녀의 삼촌 솔 워필드(“Sol” Warfield)는 어린 베시를 불쌍히 여겨 그녀의 생활일체를 돌보아 주었다. 1912년 16살의 나이로 기숙 학교에 입학한 베시는 자신의 이름인 베시가 “암소들에게 흔하게 붙여지는 이름“이라는 이유로 이후부터는 베시를 제외한 윌리스 워필드를 자신의 이름으로 사용한다.

1914 년 발티모어의 상류 사회에 들어간 월리스는 재산이 부족하다는 약점과 그리 뛰어난 미인이 아니었음 불구하고 자신만의 활기찬 개성과 우아한 패션 감각으로 수많은 구혼자들을 거느리게 된다. 그녀는 1916년 11월 8일 젋은 해군 대위 얼 윈필드 스펜스(Earl Winfield Spencer)와 결혼을 한다.

그러나 허니문이 끝나갈때쯤 월리스는 남편이 질투심이 매우 강하고 - 스펜스 대위는 자신이 집에 없을 때 그녀를 침대에 묶어놓고 싶어 했다 - 알콜 중독 증세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1921년 월리스는 남편에게 별거를 선언하고 워싱턴으로 가 새출발을 한다. 그녀는 이 기간중 수 많은 연애 사건을 벌였으며, 중국 북경의 상류 사회에서 1년간을 보내기도 했다. 1927년 월리스는 첫 번째 남편 얼과 이혼을 하게된다.

1928년 월리스는 경제적으로 다시 어려움에 처하게 되지만, 운 좋게도 아버지의 선박중개업을 돕고 있던 믿음직스럽고 존경할 만한 영국계 미국인 어니스트 앨드리치 심프슨(Ernest Aldrich Simpson)을 만나 결혼을 한다. 새로운 심프슨 부인이라는 이름을 얻은 월리스는 거주지를 영국 런던으로 옮기고 재빨리 상류 사회의 중심으로 들어간다. 그녀는 수많은 파티를 성공적으로 주최해 사람들로부터 다른 사람이에 대한 동정심이 많고 이해력이 풍부한 세련된 여성이라는 칭송을 듣는다.


윈저공

황태자 에드워드는 1894년 6월 23일 영국 서리 리치먼드에서 부왕 조지 5세와 메리 여왕 사이에서 축복속에 태어났다. 그는 오스본의 해군 사관 학교와 옥스퍼드의 다트무어(Dartmouth)와 막달렌(Magdalen) 칼리지에서 수학했다. 황태자가 된 것은 그의 나이 17살인 1911년 되던 했였다.

1차 세계 대전이 반발하자 프랑스, 이태리, 이집트에서 참모직으로 전쟁에 참여했으며, 1919년부터 1936년 사이에는 미국, 일본, 남아메리카, 영연방등지를 여행했다. 그가 보여준 숱한 패션은 그에 얽힌 화제를 뿌리고 다녔고 그의 옷차림은 신문과 잡지, 그리고 기록 영화를 통해 세계로 퍼져나가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그가 한번 입었던 옷차림은 그것이 점잖은 것이건 파격적인 것이건 그대로 정석으로 받아들여져 귀족은 물론 세계 비즈니스맨들에게 대유행되었다. 그는 글렌 체크(Glen Check) 무늬를 정장으로 입어 귀족사회를 놀라게 했고 윈저 놋트(Windsor Knot)라는 넥타이 매듭법과 깃 사이가 넓은 윈저 칼라 셔츠(Windsor Collar Shirts=Wide Spread Collar Shirts)를 고안해 냈으며, 트위드 자켓(Tweed Jacket)을 평상의 외출복으로 개량해 입었다. (당시 트위드 자켓은 전원생활 속의 낚시나 사냥복으로 사용되었음), 패턴 온 패턴(Pattern on Pattern) - 서로 다른 무늬를 겹쳐 입는 코디네이션 방법 - 을 처음 창시하기도 하는 등 수 많은 유행의 선도자이기도 했다. 국민들에게 격식을 무시하고 자유로운 태도를 보이는 황태자의 인기는 가히 폭발적이었다.


나는 사랑하는 여인의 도움과 지지 없이는 왕으로서의 의무를 다할 수 없고 그 무거운 책임을 짊어질 수도 없음을 알았다

세기의 로맨스

1931년 6월 월리스 심프슨 부인은 궁에 초대를 받고 처음으로 황태자 에드워드를 대면하게 되는데, 당시 파란색 드레스를 입고 있던 심프슨 부인의 인상적인 모습에 에드워드가 그녀에게 말을 건네게 되면서 그들의 첫 만남이 시작된다.

1932년 심프슨 부처는 에드워드 황태자의 주말 별장인 포트 벨베데어(Fort Belvedere)의 공식 손님이 되었고, 심프슨 부인과 - 친구들 사이에서는 데이비드라고 불리우는 - 에드워드 황태자는 거의 매일 저녁 시간을 함께 보내며 강한 우정을 나눈다.

심프슨 부인은 매일의 식사 메뉴의 계획부터 데이비드의 애완동물을 돌보기까지 포트 벨베데어의 모든일을 담당하여 비공식적인 포트 벨베데어의 안주인 역할을 한다. 후에 심프슨 부인은 그녀가 심프슨과의 결혼생활 동안에는 왕자와의 관계가 순수했다고 주장했지만, 당시에 심프슨 부인과 황태자는 거의 대부분의 시간을 연인처럼 행동했다.

왕자와 윌리스 심프슨의 관계는 서로합의간에 서로에게 매우 이로운 것으로 보였다. 심프슨은 새로 누리게 된 자신의 사회적 지위를 매우 즐겼으며, 황태자는 버킹검의 억압적인 분위기에서 벗어나 솔직한 미국인 심프슨 부인과 함께 활기찬 생활을 즐겼다. 그러나 그들의 관계를 아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심프슨 부인이 심약한 왕을 지배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1935 년 이 커플을 마침내 결혼하기로 결정하지만, 영국 국교회는 이혼에 반대했고, 왕실법상 왕족은 의회의 동의없이는 결혼할 수 없었다. 심프슨 부인의 남편 어니스트 심프슨은 황태자가 심프슨 부인에 대한 신의를 지킨다면 조건 없이 이혼해 주겠다고 선언한다.

1936년 2월 20일 조지5세가 서거하고 에드워드 황태자가 에드워드 8세로서 즉위하면서 두 사람의 문제는 국민적 문제로 확대된다. 영국 국민들은 자신이 사랑하는 젊은 왕이 미국 출신의 이혼녀와 결혼하는 것을 용납하지 못했다. 1936년 10월 심프슨 부인이 이혼가판결을 받고 이들 커플이 결혼한다는 소문이 퍼지게 된다. 총리 스탠리 볼드윈(Stanley Baldwin)이 귀천상혼의 결혼에 강력히 반대하면서(심프슨 부인이 나치 지지자여서 반대했다는 설도 있음) 왕의 결혼 문제는 왕과 내각 사이의 힘겨루기의 양상을 띄게 된다.

왕실은 에드워드가 의회의 동의없이 결혼하려면 하야해야된다고 선언한다. 에드워드는 그가 선택한 여성과 결혼을 하기 위해서 그의 권리를 주장했지만, 국민과 정부는 그녀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해결방안이 생기지 않자 왕은 325일만에 스스로 군주의 자리에서 물러나기로 결심한다.

1936년 12월11일 밤 10시 BBC 라디오 방송에서 《나는 사랑하는 여인의 도움과 지지 없이는 왕으로서의 의무를 다할 수 없고 그 무거운 책임을 짊어질 수도 없음을 알았다》는 요지의 하야 연설을 한다.

에드워드는 동생 조지 6세의 대관식에서 《폐하께 신의 은총이 계시옵기를, 나는 왕이 아닐지라도》라는 말을 남기고 오스트리아로 떠난다. 에드워드와 심프슨 부인은 부인의 이혼결정이 날 때까지 떨어져 지내야 했다. 1937년 4월 27일 심프슨 부인의 이혼이 결정되고, 1937년 6월 3일 월리스 워필드와 에드워드는 프랑스의 외곽 투소(Tours)의 교회에서 - 왕실 가족은 아무도 참석하지 않았다 - 영국교회 신부의 주재로 작고 소박한 결혼식을 올린다. 신랑과 신부의 나이는 42세와 40세였다.

그 날 심프슨 부인이 입었던 드레스, 모자, 장갑, 신발등은 모두 푸른색 일색이었고, 그녀가 가져온 80여벌의 옷도 디자인만 다를 뿐 역시 푸른 계열의 옷이었다. 이것은 당시 심프슨 블루라 하여 왕관을 버린 사랑에 공감하는 사람들의 유행색이 되기도 했다.

조지 6세는 에드워드에게 윈저 공작 전하(Duke of Windsor, Royal Highness) 라는 지위를 하사하지만, 공작 부인인 워필드에게는 전하라는 경칭(Royal Highness)을 내리지 않아 에드워드는 이 일을 두고두고 가슴아파했다고 한다.

결혼후 윈저 공작 부부는 모든 정치적인 일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쇼핑과 수 많은 파티를 즐겼다. 그들은 파리에 집을 장만했고, 프랑스의 보아 드 볼로냐 (Bois de Bologne)에 윈저 빌라라고 불리우는 웅대하고 정교한 고급 맨션을 소유했다. 공작 부인는 가사일을 해결하기 위해서 18명의 하인을 고용했으며 자신의 옷,보석, 그리고 전체적인 스타일에 대해서 대단한 자존심을 소유하고 있어 유럽 최고의 디자이너의 드레스를 입었고, 헤어 스타일은 하루에도 여러번 손질 받아 삶을 살아가는데 있어 전하(Royal Highness)라는 호칭은 별 필요가 없다는 것을 재빨리 증명했다.

대부분의 일상 생활에서 이 화려한 커플은 특별 대우를 받았고 상류 사회의 중심이었다. 그러나 정치적면에 있어서는 항상 외곾에 머물러 있어야 했다. 공작 부처는 1937년 10월 나치 독일을 여행하면서 히틀러의 후원자라는 오명을 쓰게 된다. 윈저 공작 부인은 당시 주영독일대사였던 요아킴 폰 립벤트로프와 외도를 한다는 소문에 시달렸고, 열렬한 나치 지지자라고 불리기도 했다. 더 나아가서 이차 세계 대전전쟁 당시 프랑스의 칸에서 거주하고 있던 에드워드는 자신을 정부의 요직에 기용하지 않는다고 불평을 늘어놓아 이들 부부의 평판은 한층 더 악화됐다.

1940년 나치의 세력을 피해 포루투갈의 리스본에 있는 동안 공작 부처는 왕으로부터 영국령 바하마의 총독으로 임명된다. - 이것은 당시 영국내에 퍼져있던 윈저 공작 부인의 스파이 혐의 때문에 바하마로 유배되었다는 설도 있음 - 전(前) 왕을 위한 직업으로는 상대적으로 하찮은 일이었지만, 에드워드와 윌리스는 이 임명에 매우 만족스러워 했다. 그러나 바하마의 삶은 그들 부처가 살았던 화려한 삶과는 거리가 멀었고 점차 그들 사이의 불화설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전쟁 후 윈저부처는 미국과 유럽 일대를 여행하거나 프랑스의 자택에서 조용한 시간을 보냈다. 1956년 윈저 공작 부인은 자신의 회고록 《The Heart Has Its Reasons》을 출간한다. 윈저 부처와 왕실의 갈등은 윈저 공작 부부가 1967년 엘리자베스 2세의 초대로 메리 여왕(공작의 어머니)의 기념비 제막식에 참석하기 위해 모습을 드러냄으로써 공식적으로 막을 내렸으며, 5년 뒤 에드워드가 심각한 병에 걸려 사경을 헤매고 있을 때 엘리자베스 여왕과 에딘버러 공작이 파리의 저택으로 직접 문명을 오기도 했다.

1972년 5월 28일 에드워드는 지병으로 자택에서 숨을 거둔다. 윈저 공작 부인은 남편에 대한 마지막 사랑을 표현하기 위해 검은 상복 위에 심프슨 블루의 숄을 걸쳤다. 그 후 윈저 공작 부인은 14년을 더 살다가 지병과 쓸쓸함 속에서 1986년 4월 24일에 자신을 심프슨 블루의 옷으로 갈아입혀달라는 유언을 남기고 숨을 거뒀다. 어떤 이가 세기의 로맨스에 대한 부러움을 드러내자《그 세기의 로맨스가 얼마나 힘든일인줄 아느냐》고 답한 심프슨 부인의 말에는 그녀의 굴곡진 삶이 묻어나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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