칙릿에 대한 오해와 진실 혹은 대담

by 삼월토끼 posted Sep 29,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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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 칙릿 열풍이다. 주요 신문마다 칙릿에 대한 상세한 분석 기사를 쓰거나 하나의 사회 현상으로 보도하기에 바쁘다. 과거에도 줄곳 그 자리에 있었던 칙릿이 왜 갑자기 한국 사회에서 주목을 받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아마도 이것은 줄곧 불황인 출판 시장에서 《생활여자백서》《여자의 인생은 20대에 결정된다》같은 일렬의 여성용 처세서와 《쇼퍼홀릭》《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등의 칙릿 소설의 히트에 힘입은 봐 크다. 또한 올해 인터넷 최대 화두가 될만한 《된장녀》 논쟁에서 칙릿이 중요 아이템으로 등장하면서 더더욱 사람들은 칙릿에 주목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와 관련하여 나름대로 칙릿에 대한 각종 분석 기사들이 쏟아졌는데 지금까지 신문이나 잡지,인터넷 등에 보도된 칙릿을 바라보는 시선은 크게 두가지다.

트렌드를 앞서 나가는 여성들 – 주로 패션 분야- 과 연계시켜 이제까지의 전통적인 한국 여성상과는 전혀 다르게 행동하고 소비하는 신여성이 등장했다는 식의 기사에서 등장하는 머스트 해브 아이템 혹은 위에서 언급한 《쇼퍼홀릭》《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를 필두로 한 국내에서 크게 히트한 몇몇 칙릿에 의존해 – 국내는 번역된 칙릿이 십여권이 안 될 정도로 이제 막 칙릿 시장이 태동하는 시기다. - 칙릿이란 장르 전체에 대해서 분석을 하는 기사다. 두 시선 다 공통적으로 칙릿이란 장르의 숲 전체를 보는 것이 아니라 가지 일부만 보고 칙릿을 도매 급으로 넘겨 버리는 오류를 범하고 있는 것이다. 그럼 대체 칙릿이 무엇인지 그것부터 알아보도록 하자.

칙릿의 원형적 의미


우선 미디어에서 분석한 칙릿의 주요 출처로 등장한 것은 위키디피아다. 위키디피아는 우리네 《네이버 지식인》 같은 개방형 백과사전 서비스로 쉽게 답을 얻을 수 있지만 이런 서비스에는 늘 있는 맹점으로 부정확한 지식들로 버젓이 등록된다는데 있다. 한 때 한국이란 설명에 한국을 비하하는 내용들이 올라있어서 인터넷 이슈화 됐던 사이트도 바로 이 사이트다.

위키디피아에 올라있는 칙릿에 대해서 참조해 정의를 내리면 대략 이렇다.

칙릿은 젊은 여성을 뜻하는 미국식 속어 칙(Chick)과 문학(literature)의 축약어인 릿(lit)이 합쳐진 조어로 최신 유행에 민감하며 도시에 - 주로 뉴욕 맨하튼 - 거주하는 20~30대 여성의 연애와 직장 - 출판,광고,패션 산업 관련된 – 에서 겪는 어려움이 주된 줄거리다. 칙릿이란 용어가 최초에 사용된 예는 1995년 크리스 마자(Cris Mazza)와 제프리 드쉘(Jeffrey DeShell)이 공저한 《Chick Lit: Post feminist Fiction》이란 앤솔러지에서 처음 등장했다. 물론 여기서 사용된 칙릿이란 용어는 지금 칙릿 장르와는 거리가 멀어도 한 참 먼 용어로 여성 작가들이 쓴 전통적인 형태의 문학 작품을 지칭하는 단어였다. 1996년 칼럼니스트 제임스 월콧(James Wolcott)이 《뉴욕커》에 기고한 글에서 동시대의 다른 여성 칼럼니스트의 글에는 공통적으로 소녀풍(girlishness)적인 면모가 있다며 이것을 칙릿이란 지칭하면서 지금의 의미로 사용되기 시작했다. 헬렌 필딩의 《브리짓 손스의 일기》와 캔디스 부쉬넬의 《섹스 앤 더 시티》가 전세계적으로 히트하면서 비슷한 책들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해 하나의 장르를 이루게 되었다.


한 신문에서 정의 내린 칙릿은 이렇다. 그리고 다른 곳도 이와 비슷하다.

  1. 여주인공은 대개 홍보, 광고, 언론, 패션계에서 일한다.
  2. 1인칭 주인공 시점으로 가볍고 웃기는 구어체를 구사한다.
  3. 잘생긴 왕자보다 미스터 라이트(Mr.Right)를 찾는다.
  4. 패션 브랜드가 형용사처럼 쓰인다.
  5. 결국 주인공은 인생의 교훈을 얻고 성장을 경험한다.

《[커버스토리]2030女, 프라이드를 입다,동아일보》



이것에 대한 정의는 반은 맞고 반은 틀리다. 위키디피아의 수박 겉햛기식 정의가 아닌 좀 더 깊은 시선이 필요하다. 대체 정확하게 칙릿이란 무엇인가?

「젊은 여성들이 동경하는 패션업이나 미디어 등의 직업을 가진 대도시 사회 초년생 여성들의 삶과 스타일을 풀어가는 가벼운 소설 《패션, 쇼윈도를 걸어나와 책 속으로 가다,주간한국 2006-09-28일자》」 이 칙릿의 전부일까?

아쉽게도 칙릿의 여주인공이 한결같이 이 시대의 젋은 여성들이 동경하는(한다고 알려져 있는) 패션업이나 미디어 등의 직업을 가지고 대도시에 거주하지 않는다. 또한 패셔니스타 혹은 패션피블도 아니다. 몇권의 히트한 칙릿 중 알록달록한 커버에 표지에 쇼핑백과 구두 옷이 그려져 있다고 해서 "칙릿=패션" 부등기호를 마구 사용하는 것은 칙릿을 보는 가장 큰 오류다.

과거에 비해 현대 시대에는 패션이 여성의 삶에서 중요 비중으로 자리잡았고 브랜드가 하나의 자아증명 역할을 하므로 그 영향으로 소설 속에서 자연스럽게 언급되는 것을 너무 확대 해석하는 경향이 있다. 그리고 여주인공의 연령 대 역시 20대 초반의 사회 초년생도 아니며 칙릿의 여주인공은 20대부터 40대까지 다양하게 걸쳐 있고 이미 직업적 성공을 이룬 여성도 다수다.

칙릿이 지금까지의 여성용 소설들과 차별 점이자 장르의 아이덴티티를 부여하는 특징은 여성 작가들이 동시대에 사는 대다수의 여성들을 위해서 쓴 수다미학적 장르 소설이라는 데 있다. 칙릿을 읽는다는 것은 마치 친한 친구끼리 모여서 진한 수다 한판을 나누는 것과 같은 효과를 준다. 사랑,결혼,데이팅,관계 맺기,우정,쇼핑,룸메이트,몸무게,중독등등 현대 여성이라면 누구라도 친구와 이야기를 나누는 일상다반사가 모두 칙릿의 소재가 된다. 친한 친구와 모여서 떠드는 것 같은 친밀성을 위해서 많은 칙릿들이 1인칭 형식을 취하긴 하지만 1인칭 시점이 절대적인 것은 아니다. 다만 3인칭 시점이라 해도 어디까지나 관찰자의 시점이므로 기존의 다른 소설들처럼 타인의 속마음까지 환하게 묘사해 주진 않는다.

현실의 여성들이 끊임없이 어려움에 직면하는 것처럼 칙릿의 여주인공들도 계속해서 암초에 부딪치고 – 그것이 폼나는 뉴욕 한가운데든 영국 시골이든 상관은 없다. 세상 모든 여성들이 사는 게 힘든 것처럼 그녀들도 사업에 실패하고 직장에서 바보 취급 당하고 데이트를 망치고 결혼에 실패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문제를 해결하려 노력하고 꿈을 찾아 떠난다. 종국에는 일에도 성공하고 사랑에도 성공하는 페어리 테일의 현대판 버전이라 할 말한 소설인 것이다.

칙릿의 가장 의의점은 지금까지 사소한 것들에 역사로 치부됐던 여성의 일상사가 하나의 문학 장르로 까지 부상 했다는 데서 찾을 수 있다. 남성의 시선에 의해 박제된 여성이 아닌 힘차게 살아 숨쉬고 있는 현대 여성들이 이제 소설 시장의 주류로 떠올랐다는 점은 가히 높이 살 만하다. 그렇다면 칙릿에는 문제점이 없는가? 칙릿은 수다,그 참을 수 없는 가벼움을 그대로 전해준다. 삶에 대해 고민하는 진중한 칙릿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대다수가 지나칠 정도로 삶을 희화시키며 나름의 장르적 판타지를 위해서 여주인공들은 별 어려움 없이 우연한 기회에 행운이 따라 꿈을 성취하고 왕자님은 아닐지언정 왕자에 버금가는 멋진 남자와 사랑에 빠진다. 여주인공이 지나칠 정도로 물신주의와 자본주의에 늪에 빠져있는 허영덩어리 된장녀라는 논란은 몇몇 유명 소설에 한정되 있으므로 크게 언급할 가치는 없다.

칙릿은 로맨스 소설의 진화인가?


많은 칙릿 기사를 보면 유독 하나의 공통점이 보인다. 바로 로맨스 소설과의 비교이다.

로맨스 소설이 뛰어난 외모와 순진성을 무기로 잘난 남자 만나 성공하는 신데렐라의 여성성을 추구했다면 ‘칙릿’은 ‘내가 원하는 것은 내 능력으로 쟁취한다’는 자본주의 시대의 여성상을 보여준다. /패션, 쇼윈도를 걸어나와 책 속으로 가다(한국일보)

예전엔 젊은 아가씨들을 겨냥한 대중소설은 대개 직장이 없는 여자 주인공이 느닷없이 미남 부자와 사랑에 빠지는 ‘할리퀸 로맨스’였던 데 반해, 요즘 치크리트는 외화 시리즈 ‘섹스앤드시티’에서 처럼 일에서 성공하려는 야망을 품고 있는 주인공이 현실적인 상대와 연애를 하는 내용으로 바뀌었다./세련된 삶 꿈꾸는 20대 여성들 대중소설-자기계발서에 푹 빠져(동아일보)

젊은 여성(Chick) 독자를 노린 소설(lit.literature)로, 말하자면 로맨스 소설의 신 버전이다. 로맨스 소설이 매우 여성적인 여성이 낭만적인 사랑을 얻는 얘기라면, 칙릿의 장르 문법은 다소 중성적인 여성이 사회적 성공과 더불어 사랑마저 쟁취한다.
칙릿이 로맨스 소설보다 진화한 장르란 증거가 되기 때문이다. 칙릿에선 ▶여성이 사랑을 기다리지 않고 쟁취하며▶꽃미남보다는 'Mr. Right'(바른 생활 사내)가 이상형이 된다. 적어도 신데렐라는 면한 것이다. /[손민호기자의문학터치] 브리짓 존스 혹은 삼순이 같은(중앙일보)


분명 칫릿은 이제까지와는 없었던 새로운 여성 문학 장르임에는 틀림이 없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로맨스 소설 장르를 과거의 유물로써 단순 비교하는데는 선뜻 동의가 되지 않는다. 흔히들 국내에서 로맨스 소설하면 떠오르는 할리퀸 로맨스가 로맨스 소설 전체를 대변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학창 시절 한두권 읽은 할리퀸 로맨스로 로맨스 장르 전체를 매도하지 말아달란 말이다. 어디까지나 할리퀸은 로맨스 장르의 일부분일 뿐이다. 할리퀸을 곧 로맨스 소설로 인식해 무지를 들어내는 것을 보면 안타까움을 넘어 분노가 샘솟는다.

뛰어난 외모와 순진성을 무기로 잘난 남자 만나서 성공하는 신데델라 여성성이 할리퀸의 전형적인 여주인공이었던 시절은 과거형이 된지 오래다. 로맨스 문학은 그 어떤 장르보다도 페미니즘 진영에서 날카로운 공격을 받아왔으며 자체적으로 정치적인 올바름의 검열을 가해왔고 보다 현실적인 공감을 자아내는 로맨스를 쓰기 위해서 노력해 왔다. 여주인공의 직업이 미군 특수부대 요원으로 설정 된 밀리터리 로맨스가 뉴욕 타임즈 베스트 셀러 리스트에 오른 것이 3~4년전인데 “여성적인 여성이 낭만적인 사랑을 얻는 얘기”는 대체 언제적 로맨스 소설에 관한 이야기인지 되묻고 싶다.

할리퀸만 해도 장르적 진화를 거듭해 독서 시장에서 살아남았다. 물론 전통적인 신델레라형 여주인공의 존재 자체를 부인 할 수 는 없다. 할리퀸의 긴 역사만큼 독자층도 다양하며 전통적인 할리퀸을 좋아하는 독자층도 여전히 존재해 할리퀸 프레젠트라는 타이틀을 달고 이런류 작품이 지금까지 나오기 때문이다. 하지만 현재 할리퀸의 대세는 칙릿과 별 차이없다. 내가 원하는 것은 내 능력으로 쟁취한다는 모토가 할리퀸을 잠식한지 오래다. 할리퀸의 그녀들도 직장과 사랑을 양립시키기 위해서 늘 고민한다. 대다수의 국내 독자들은 모르고 있지만 할리퀸에는 칙릿과 유사한 소설들이 나오는 할리퀸 플립사이드라는 브랜드가 별도로 마련돼 있으며  이미 2001년 10월부터 할리퀸 엔터프라이즈사(할리퀸 출판사)에서는 레드 잉크 드레스(Red ink dress)라는 칙릿 전문 브랜드를 성공적으로 런칭한 바 있다.


칙릿은 성공하려는 야망을 품고 있는 여성이 현실적인 상대와 연애를 한다? 《쇼퍼홀릭》의 베키 블룸우드는 시시한 경제잡지 기자로 있다. 사실 그 일에 대해서 전문성도 없으며 앞으로의 야망이라고 하는 것은 근사한 패션 잡지에서 글을 쓰는 것이다. 그녀가 사랑에 빠지는 상대는 루크 브랜던이라는 금융 전문 홍보사의 대표 이사로 부자에 능력 있고 잡지에 잘난 독신남으로 단골로 실리는 인물이다. 베키는 그를 전혀 염두해 두고 있지 않있지만, 《오만과 편견》의 미스터 다아시의 전통을 잇듯 별볼일 없는 베키와 사랑에 빠진다. 브리짓 존스도 이와 비슷하며 대게의 칙릿의 여주인공들은 현실적인 상대라긴 보다는 지금까지는 몰랐던 금광을 캐듯 주변에 항상 잘난 남자가 자신을 지켜보고 있다. 현실적이란 말로 새롭게 재단했다 해도 여성들이 바라는 높은 욕구에 걸맞는 나름의 로맨스 판타지를 갖추고 있는 것은 로맨스 소설과 별반 다르지 않다. 덧붙여 여성 소설에서 꽃미남은 원래 인기가 없었다. 여성 문학의 원조라 할 말한 《오만과 편견》시절부터 여주인공들은 한 번쯤 꽃미남에 혹해 주변에 있는 – 그것도 오직 자신만 바라보고 있는 - 근사한 남자를 몰라보다가 뒤늦게 알아차리고 마음을 졸여왔다.

애초에 로맨스 장르와 칙릿을 가지고 비교우위를 논한다는 것부터가 기린과 얼룩말을 놓고 어느것이 더 진화했냐고 논쟁하는 것만큼 우스운 행위이다. 로맨스 소설과 칙릿은 모두 고유의 특성을 지닌 여성문학의 하위 장르일 뿐이다. 로맨스 소설은 이야기의 70% 이상이 로맨스에 중점을 두고 있어야 하며 사랑에 대한 강력한 메시지를 전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한마디로 로맨스 빼곤 다 들러리라는 이야기다. 반면 칙릿은 사랑이 그리 큰 비중을 차지 하지 않는다. 사랑은 칙릿에서 몸무게와 같은 값으로 취급될 정도로 여성의 삶의 일부분일 뿐이다. 덧붙여 칙릿이 현실과 적당한 타협을 한 만큼 등장 하는 남자 주인공들은 역시 여주인공들에 뒤지지 않게 현실적이다. 사회적으로 성공한 것에 비례해 연애를 소홀히 하며 끊임없이 사랑을 호소하지도 전적으로 여성의 편을 들어주지도 않는다. 무엇이나 얻는 것이 있으면 잃는 것도 있는 법이다.

결론적으로 로맨스 문학과 칙릿을 비교를 해 기존 장르를 어설프게 깔아뭉개는 것 보다는 사랑에 한정되었던 여성용 독서 시장에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는데서 진정한 의의를 찾는 것이 옳다고 본다.

로맨스 소설은 자신의 테두리 안에서 진화할 것이고 칙릿 역시 변화하는 세태에 따라 맘릿,시스타릿,미스터리릿 처럼 계속해서 발전해 나갈 것이다. 근사한 사랑 이야기가 읽고 싶으면 로맨스 소설을 읽고 친구와 수다가 한 판 필요하다면 칙릿을 읽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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