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가서 크리스티는 따로 언급할 필요가 없을 정도의 지명도를 가진 명실상부한 추리 소설의 여왕이다. 주변에 있는 여러 지인들 중에는 추리 소설 매니아가 많은데 유독 애가서 크리스티의 소설을 기피하는 이가 있어서 이유를 물으니 애가서 크리스티 특유의 달콤함이 싫어서란다. 붉은색이 피인줄 알고 찍어보았더니 초콜릿이어서 속은 느낌이라나. 반면 작품 전체에 흐르는 로맨틱 모드와 낙천주의 때문에 애가서 크리스티 소설 중에서도 이런 성향이 강한 초기 작품을 찾아 읽는 독자도 적지 않다. 필자도 그런 독자 중에 한 사람으로 모험심 넘치는 젊은이들이 무작정 세상으로 뛰쳐나가는 이야기를 유난히 편애한다. 이런 작품으로는 공갈 협박으로 돈을 벌겠다는 생각에 모험가 클럽을 결성한 백수 커플 토미-터펜스(비밀결사: The Secret Adversary, 1922), 첫 눈에 반한 남자를 찾아 12파운드만 가지고 무작정 바그다드로 여행을 떠나는 최고의 무 대책 캐릭터 빅토리아(바그다드의 비밀: They Came to Baghdad, 1951), 추리보다는 로맨스에 방점을 찍은 단편들 때문에 일부 독자들에게는 속았다는 기분마저 안겨 준 단편 모음집 리스터테일 미스터리(The Listerdale Mystery, 1934)등이 이런 류에 이야기에 속한다. 특히 1924년에 발표한 4번째 추리 소설 <갈색 옷을 입은 사나이>는 요즘 로맨스 소설의 로맨틱 미스터리 물의 모범으로 삼아도 될 정도로 로맨스 색채가 뚜렷하다

첫 번째 남편이었던 아서 크리스티의 상관인 E A 베첼러(E A Belcher) 소령에게서 자신의 집인 “밀 하우스 저택의 미스터리”에 대해서 써달라는 제안을 받고 난 뒤 창작한 작품으로 실제 소설 속에는 밀 하우스 저택이 등장하며 베첼러 소령은 유스터스 페들러경의 캐릭터 모델이 되기도 했다. 책으로 출간 되기 이전 책으로 이브닝 뉴스(The Evening News)에 “모험녀 안나(Anna the Adventuress)”이라는 제목으로 연재됐었으며 당시 받은 원고료는 오백 파운드였다.

 

인류학자 아버지와 사는 앤 베딩펠트는 모험과 사랑과 로맨스를 갈망해왔으나, 그저 단조로운 생활이라고 영위하라고 운명 지어진 듯했다. 아버지의 갑작스런 사망 이후 아버지의 사무 변호사를 따라 런던으로 상경하면서 그녀의 인생에 그토록 바라던 모험의 냄새가 스며들어온다. 앤은 지하철역에서 특유의 좀약 냄새를 풍기던 사내가 철로에 떨어져 감전사하는 현장을 목격한 뒤 – 영국은 한국과 다르게 철로에 전류가 흐른다 – 놀라 사고 현장을 떠나다가  자칭 의사라던 사내가 떨어뜨린 쪽지를 줍게 된다. “17.122 킬모튼 캐슬” 이라는 암호문 같은 글자가 써있는 쪽지에서 죽은 사내의 좀약 냄새를 맡게 된 앤은 미스터리를 직감하고 연달아 밀 하우스 저택에서 신원을 알 수 없는 여자 시체가 발견되자 사건 파악에 나선다. 사건 현장을 헤집고 다니던 앤은 별 소득 없이 돌아다니다 킬모튼 캐슬이 남아프리카로 향하는 유람선 이름임을 알게 되자 전 재산 87파운드로 1등석을 산다. 킬모튼 캐슬호에 승선한 앤은 사교계의 명사인 수지 블레어 여사와 친구가 되고 정체를 알 수 없는 레이스 대령을 통해서 돈이 되면 무슨 일이든 한다는 비밀 조직과 드비어 다이아몬드 도난 사건의 내막 을 듣게 된다. 한편 살인 사건이 일어났던 밀 하우스 저택의 소유주인 유스터스 페들러경 또한 킬모튼 캐슬호에 승선해 있어 미스터리는 한층 더 깊어지고 앤은 밀 하우스 저택에 살인범으로 알려진 갈색 옷을 입은 사나이 해리 루카스에게 남모를 설렘을 느낀다.

 

줄거리는 이제는 너무나 익숙해 져버린 로맨틱 미스터리의 관습적인 전개로 이어져 있지만 앤의 고백은 여느 로맨스 소설에 뒤지지 않을 정도로 열정이 넘친다. “지독히도 애가 타요. 그를 본 순간 내 인생은 완전히 뒤집혔어요. 저는 그를 사랑해요. 그를 원해요. 그를 찾을 때까지 맨발로라도 아프리카를 샅샅이 뒤지겠어요. 그리고 그가 저를 원하도록 만들 거예요. 그를 위해 죽을 수도 있어요. 그를 위해 일하고, 아니 노예라도 되겠어요. 그를 위해 도둑질이라도 하겠어요, 그를 위해 애걸하고 구걸하기까지 하겠어요.”


이런 앤의 열정 앞에서도 전형적인 영국인 캐릭터인 블레어 여사는 “당신은 굉장히 비 영국적이군요”라는 반응을 보여 웃음을 자아낸다. 앤은 처음에는 알 수 없는 역마살에 집을 뛰쳐 나가지만 결국 그녀가 찾아 헤맨 것은 ‘솜씨를 발휘’할 만한 상대가 아니었을까? 그녀는 평소 꿈꾸던 적들을 한 밤에 무찌르는 강인하고 과묵한 로디지아인인 레이스 대령 대신 쇠사슬에 묶인 거친 개 같은(!) 사내 해리를 선택한다. 모험녀 안나 에게는 자신을 지켜줄 전사보다는 길들일 야수가 더 어울리긴 하다. 앤에게 실연당한 불우한 레이스 대령은 이 후 세편의 소설에 - 테이블 위의 카드(Cards on the Table, 1936), 잊을 수 없는 죽음(Sparkling Cyanide, 1937), 나일강의 죽음(Death on the Nile, 1945) – 조연 캐릭터로 등장한다.


책을 추천한 삼월토끼는 누구?

로맨스 에디터. 평생을 살아오면서 책읽기,글쓰기,영화보기,연예 가쉽 즐기기,드라마 비평하기,공상하기,
타인의 연애사 훔쳐듣기 외에는 그다지 잘하는 것도 좋아하는 것도 없다는 자성적 결론을 내리고
1인 미디어 로맨스 웹진 로맨시안을 만들었다. 아침잠을 즐기며 고양이를 좋아한다.


애거서 크리스티 전집 28 - 8점
애거서 크리스티 지음, 유혜경 옮김/황금가지
애거서 크리스티 전집 33 - 8점
애거서 크리스티 지음, 이수경 옮김/황금가지
애거서 크리스티 전집 4 - 8점
애거서 크리스티 지음, 이선주 옮김/황금가지
바그다드의 비밀 - 8점
애거서 크리스티 지음, 이은주 옮김/해문출판사
리스터데일 미스터리 - 8점
애거서 크리스티 지음, 유인숙 옮김/해문출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