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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르 현대
국가 한국
출판년도 2008.06
출판사 우신출판사
나는 우선 이 책의 날개카피를 쓴 마케팅 직원에게 찬사를 바치고 싶다. 그리고 그것이 이 책에 주는 칭찬에 전부다. 그 카피가 아니었다면(실제 내용을 알았더라면) 절대 이 책을 선택하지 않았다. 여기서 글쓴이를 보기 좋게 낚은 멋진 카피를 보고 가자.

서울중앙지방검찰청 마약, 조직범죄 수사부 담당검사, 최재형.
사법연수원을 갓 졸업한 신출내기 변호사, 지서영.
범죄자가 가장 두려워하는 최악의 하운드(사냥개), 최재형 검사와
이제 갓 사법연수원을 졸업한 신출내기 변호사의 불꽃 튀는 공방이 시작된다!
봄빛처럼 빛나던 과거의 시간을 뒤로한 채 그들은 승리를 위해 칼을 치켜들고…….
"이번 사건의 피의자는 선배가 소탕하려는 악의 무리가 아니에요!"
"그건 법이 결정해."
"법이 무고한 자에게 벌을 준다면 전 그 법과 싸우겠어요!"
그들의 봄빛은 사라졌다. 그리고 그들의 시간도 멈추었다.
하지만, 이제 그 시간이 다시 흐르기 시작한다.
다시 시작된 두 사람만의 러닝타임!

그냥 로맨틱 스릴러물도 아닌 검사와 변호사의 지적 공방이 펼쳐지는 법정 스릴러라니 뇌에서는 아드레날린이 넘쳐나고 기대감으로 심장박동이 빨라지면서 과연 저 두 남녀가 팽팽히 맞서는 사건이 뭘까 하고 기대감에 한껏 가슴이 부푼다. 하지만, 마지막 장을 덮으면서 드는 생각은 이런 우수한 마케팅 직원을 뽑는 것보다는 좋은 원고를 출간하는 눈이 더 필요하지 않을까 하는 마음뿐이다. 아, 저 매력적인 카피의 주인공은 장소영이 2008년 6월에 발표한 ‘러닝타임’이다. 이 책의 소개를 아마도 내게 쓰라면 이렇게 썼을 것이다. ‘지금까지 당신이 보았던 너무나도 친숙한 한국 신파 멜로 드라마를 활자로 경험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

‘한 편의 영화를 보는듯하다.’라는 표현이 대중 장르에서 최고의 찬사로 꼽히는 이 시점에서 영상화된 글쓰기를 폄훼할 마음은 전혀 없다. 일례로 스티븐 킹의 최신작 ‘셀’에 초반부에는 가히 영상화된 글쓰기의 힘을 보여준다. 전 세계가 휴대폰 전자파에 노출된 상황을 정말 영화 한 장면처럼 생생하게 그려낸다. 글을 읽는 순간 머릿속에서 영상을 만들어내는 능력은 작가의 뛰어난 묘사력 없이는 불가능하다. 하지만, 이런 영상화된 글쓰기와 단순히 영상을 받아쓰기는 별개의 문제다. 안타깝게도 ‘러닝타임’은 후자다. 이 책은 한마디로 지금까지 글쓴이가 본(절대로 읽은 것이 아니다.) 한국 드라마 소위 우리가 한국적 신파 멜로라고 통칭하는 드라마를 얼마나 훌륭히 기억하고 있는지는 테스트하고 있는 것 같다. (가끔 할리퀸 가산점 문제도 등장한다.) 작가가 기억력을 테스트한 소설이라면 난 이 소설에 100점을 주겠다.

여주인공 지서영은 걸어다니는 신파 클리셰다. 한국 최고의 법대에 다니고 있지만, 돈이 없어서 23살에도 대학 2학년에 재학 중으로 단순히 수업료가 모자라는 수준이 아니라 천애 고아에 전세금까지 벌어야 한다. 그녀를 키운 할머니는 서영 몰래 마늘을 까 생활비를 보태려고 애쓴다. 반면 남 주인공 부잣집 아들에 졸업도 전에 사법고시에 떡 하니 붙은 재원이다. 그리고 두 사람은 재형이 학내에서 낸 교통사고 때문에 얽히게 된다. 어쨌든 가난이 극에 달하자 서영은 밤무대 가수로 나서고 당연히 업소에는 그녀를 보호해주는 남자 동탁이 있다. 재형은 서영에게 어떻게든 다가가려고 애쓰고 서영 역시 서서히 재형의 마음을 받아들이지만, 하필 재형이 서영이 일하는 업소에 오게 되고 서영은 재형이 좀 더 나은 미래를 갖게 하려고 자신과 동탁이 사귀는 사이인 척 오해하게 한 뒤 그를 떠나보낸다. 거기에 때마침 서영의 할머니는 서영이 법대를 무사히 졸업할 만큼의 보험금을 남기고 돌아가신다. 여기까지다 1권이다. 구성만 봐도 소위 드라마 전반부다.

2권은 6년 후 서영 이 변호사가 돼 바쁘게 로펌에서 일하는 시점부터 시작한다. 그리고 재형은 서울지검의 마약조직범죄수사부 검사로 이름을 날리고 있다. 두 사람은 6년 동안 마주친 일이 없다가 마동탁이 전처를 살해한 사건 때문에 조우하게 된다. 살인 사건에 대체 왜 마약부 검사가 나서는지 통 알 수 없으나 뭐가 됐든 이제는 검사와 변호사로 만나게 된 두 사람이 저 살인 사건을 놓고 창과 방패의 싸움을 벌이겠구나 싶지만, 사건은 <검사와 선생님>같은 신파극 논조로 흐지부지된다. 그리고 이야기는 국내 드라마에서 빼놓을 수 없는 악역 조연인 권력층 못된 사모님 격인 재형 모친의 등장으로 흔하디 흔한 집안 반대를 결국 사랑으로 이기고 결혼하는 감동의 결말로 마무리된다.

나는 이 소설에서 크게 세 가지를 비판하고 싶다. 첫째는 과연 이 소설에서 오롯이 작가의 머릿속에서 나온 것 소위 창의력이라고 불릴만한 것이 하나라도 있는지 여부다. 우선 현대 사회에서 서로 다른 매체가 영향을 주고받는 것을 무시할 수 없다. 하지만, 분명히 짚고 넘어가야 할 할 것은 영향은 주고받는 선에서 그쳐야 하며 그 어떤 장르라 할지라도 중심은 글이며 바로 작가가 자신의 머릿속에서 뽑아낸 바로 이야기가 핵심이다.

TV드라마를 흘끔거릴 수는 있다 하더라도 드라마를 받아쓰기는 지양해야 한다. 작가가 머릿속에 그려낸 그림을 지면으로 옮기는 것과 머릿속에서 계속해서 TV 화면을 돌리는 것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 ‘러닝타임’에서 바로 이거라고 단박에 짚어낼 수 있는 것은 서영이 현장조사를 나선 장면이다.

서영은 강간범으로 오해받는 피고인의 사건을 조사하려고 현장검증을 나서며 명탐정 홈스도 울고 갈만한 추리력을 선보인다. “보통 키라는 것이 대한민국 남자들의 대다수가 그 키이기에 보통 키라고 하는 것이 아닌가? 게다가 마른 체형의 남자는 길거리에 나가면 언제든지 볼 수 있었다. 요즘은 남자들도 얼마나 몸매에 신경 쓰는데.’라고 생각하며 피고가 절대 범인일 리 없다 여기며 복도에 나서는데 하필 그곳에서 범인과 딱 마주친다. 그리고 흔히 드라마에서 여주인공의 얼굴을 클로즈업시키며 나오는 결정적 그 대사, ‘나는 대한민국 변호사다.’를 외치며 도주하는 범인 검거에 성공. TV화면으로 봤으면 박진감 넘치는 장면이었을지도 모르지만, 지면상 달랑 몇 줄로 이 모든 걸 표현해내고 있다.

위에서 언급한 대략적 줄거리에는 나오지 않지만, ‘러닝타임’에는 엄청난 수의 조연 캐릭터들이 등장한다. 남녀 주인공이 단둘이 진지한 이야기를 할 만 장면도 없이 꽉 채운 16부작 미니 시리즈처럼 오직 이야기 전개를 위한 인물들이 줄줄이 사탕처럼 나온다. 대략 기억나는 인물만 추슬러도 최재형을 짝사랑하는 서영의 법대 동기 혜원, 재형의 법대 동기 홍철,민태, 밤무대 업소에서 일하는 동료 가수, 재형의 부모님, 서영이 일하는 로펌 저스티의 변호사 등이 각자의 이야기를 하기에 바쁘다.

정확히 세보지는 않았지만, 로맨스 소설치고 남녀 주인공들 단둘이 있는 장면이 이렇게 적게 나오는 소설도 드물 것이다. 사실 ‘러닝타임’은 로맨스 소설이라는 타이틀을 달고 있지만, 로맨스 소설의 범주에 넣기에 장르가 모호하다. 사랑 이야기가 중심도 아니고 그냥 흔히 볼 수 있는 한국 드라마 영상 소설 같다. 과거 ‘눈과 마음’ 출판사에서 자사에서 출판하는 소설은 로맨스 소설이 아니라 드라마를 만들기 위한 감성 소설이라고 한 적이 있는데 누군가 한국 드라마 영상 소설이라는 장르를 하나 만들었으면 좋겠다 싶다. 분명히 이런 소재를 좋아하는 독자층이 존재하고 나아가서 그런 글을 쓸 수 있는 작가들이 충분하다면 엄한 독자들이 로맨스 소설인 줄 알고 집어들었다고 겪는 불쾌한 경험을 줄일 수 있지 않겠는가? 그리고 만약 그런 장르를 생긴다면 그곳에서는 부디 어설픈 전문직 드라마는 표방하지 않길 바란다. 이 소설에서 나오는 대화는 정말 우습다.

두 번째는 한국적 신파에 대한 문제다. 우리는 흔히 통속적이다를 신파로 치환하는 경향이 있다. 사실 신파라는 것은 일제강점기에 서양의 멜로가 일본적 정서에 한번 걸려져서 국내에 들어온 것이다. 한국인의 한의 정서가 아니다. 신파의 나쁜 점은 관객을 극에 몰입시키려고 모든 것을 극단적으로 표현한다는 점이다. 가장 쉬운 예로 신파극에서 가난이라는 소재를 다룰 때를 떠올려 보자. 오랫동안 신파극에 길들여온 우리는 가난에 대해서 조건 없는 동정 대상에 올린다. 그래서 우리는 가난한 것은 죽는 것보다 못하며 가난이 절대 악보다도 못난 취급을 받는 세상에 살고 있다. 가난이라는 것은 절대 좋은 것이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단지 가난하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해당 인물을 비참 일변도로 이끄는 것은 손쉬운 감정몰입기제를 위한 작가적 게으름으로밖에는 생각할 수 없다. 가난하지만 건강한 사고를 지닌 인물, 가난하지만 자신의 생활에 대해서 한탄하지 않는 인물을 한국적 신파에서 찾기는 어렵다. 마찬가지로 신파극에서 흔한 소재인 죽음도 마찬가지다. 눈물 콧물 없이 위엄 있는 죽음을 그려낸 신파극을 떠올릴 수 있는가? 작가라면 이런 흔한 신파적 정서에 기대어 손쉽게 글을 쓸 것이 아니라 자신만의 독창적 시선으로 사물을 바라봐야 한다.
 
세 번째는 한국 로맨스의 고질적인 문제인 과연 이 소설에서 여주인공이 정작 한 일이 뭐가 있는가다. 장소영은 유독 강한 직업의 여성을 주인공으로 등장시킨다. 전작인 ‘아이스월드의 은빛 유혹’에서 여주인공은 남극에 간 외과 의사였고 이번에는 변호사다. 하지만, 이번에도 여주인공의 직업은 하나의 액세서리 같다. 여주인공이 세상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그녀를 구하려 애쓴다. 고학생으로 냉혹하던 세상이 왜 갑자기 남자주인공을 만나면서 친절해지는가? 어딜 가든 적재적소에서 주변의 도움을 받는다. 혹시 세상은 혼자 사는 게 아니라는 메시지라도 던질 요량이던가? 모든 것은 그녀가 이룬 것이 아니라 주변 사람들이 해준 것이다. 어설프게 독립의 팻말을 가슴팍에 단 할리퀸의 가녀린 여주인공은 정말 사절이다. 이것이 그녀의 삶인가? 아니면 운이 활짝 핀 여자 이야기인가? 누군가의 보호를 받는 여주인공을 보는데 정말 지친다.

장소영의 소설 대다수가 드라마 계약이 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분명히 드라마 계약은 훗날 책의 판매 부수를 늘려줄 호재다. 하지만, 드라마 계약이 책의 질을 대변해 주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설사 드라마화가 됐다 하더라도 책의 내용이 좋지 않다면 지금까지 드라마화됐던 한국 로맨스 소설의 전철 – 마치 할리우드가 한국 영화의 아이디어를 입도선매하는 것처럼 한국 드라마의 아이디어 뱅크로 사용되고 버려질 확률이 높다. 여기서 작가에게 묻고 싶다. 작가는 로맨스 소설은 쓰고 싶은 것인가? 아니면 익숙한 드라마 대본을 쓰고 싶은 것인가? 나는 부디 그녀가 다음 작품에서는 뻔한 드라마 대본이 아닌 제대로 된 로맨스 소설을 완성하길 기대해본다. 그래서 카피 내용만 보고 같은 불행을 겪질 않기를 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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